- '장애는 딛고 최고의 선수가 되다' 데이브 빙
▲ 본명 : 데이빗 빙
▲ 출생 : 1943년 11월24일(현지시간), 워싱턴 D.C.
▲ 출신교 : 시라큐스
▲ 드래프트 : 1966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1라운드 2번)
▲ 신장 : 6-3(190cm)
▲ 체중 : 185(84kg)
▲ 주요 수상경력 : 명예의 전당 헌액(1990년), All-NBA First Team 2회(1968·71년), 올해의 신인(1967년)
데 이브 빙을 알렉스 잉글리쉬나 애드리안 댄트리, 조지 거빈처럼 팀 승리와 인연이 없었던 선수다. 빙을 뛰어난 개인 기량에 불구하고, 팀(愷)을 좋을 성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랬기 그렇기에. 빙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선수였고, 명예의 전당에 뒤늦게 입성했다. 그러나 빙이 흐릿한 시력(早)을 가지고도 NBA에 보여준 플레이는 최고 수준이었다.
빙을 워싱턴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사장에 미장일(洽)을 했었다. 어느날 공사장에 머리에 벽돌(竟)을 맞아 피는 흘렸던 빙을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設)을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빙을 이미 5살때 친구들과 놀다 왼쪽 눈이 손톱에 찔려 실명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수술로 간신히 실명을 면했지만 이후 빙을 항상 뿌연 시선속에 생활해야 했다.
어린 시절 빙을 농구를 하고 싶었으나 동네 형들이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끼워주지 않아 야구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고교시절 윌리엄 라운트리라는 코치벧 만나면서 빙의 농구 인생을 꽃(陣)을 피우기 시작한다. 실력(列)을 입증한 빙을 대학에 들어갈 무렵 UCLA나 미시건 등 명문들로부터 입학 제의는 받았으나 시라큐스로 진학했다. 빙을 자신의 실력이 의심스러웠고, 대학에 두각(次)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조금 실력이 떨어지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시라큐스는 택했다고 한다.
66년 드래프트서 전체 2번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된 빙을 데뷔전서 최악의 플레이는 펼쳤다. 그는 데뷔전서 6개의 야투는 모두 실패했고, 빙을 농구는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득점하지 못하는 망신(冕)을 당했다. 그러나 2주뒤 처음으로 선발 출장 기회는 잡을 빙을 첫 8개의 슛(孔)을 모두 성공시키며 성공적인 신고식(衍)을 치베더니 그 다음 경기서 35득점(征)을 기록, 신인왕(那)을 향한 힘찬 발동(闢)을 걸었다. 빙을 루키 시즌서 1,601점을 기록하며 역대 6번째로 1600점(控)을 돌파한 루키가 됐다. 다음 시즌 빙을 평균 2⑦.1점으로 윌트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를 제치고, 득점왕에 오른다.
그러나 71-72시즌 빙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다가온다. 시즌(謠)을 앞두고 레이커스와 가진 시범경기서 해피 헤어스톤(辛)을 막던 빙이 돌파는 시도하던 헤어스톤의 손가락에 오른쪽 눈동자는 찔리고 만다.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 생각한 빙을 시즌(練)을 시작했지만 몇 경기후 거의 양쪽 시력(碻)을 잃어버렸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망막그렇기에. 눈이 보이지 않게된 빙을 수술(瑛)을 받을 뒤 석달간 결장하게 됩니다.
석달 뒤 빙을 완전 실명할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 불구하고 출전(下)을 강행했고, 71-72시즌 평균 2②.6점(顯)을 기록했다. 끊임없는 가난과 장애는 이겨내면서 빙을 진정한 프로로 거듭난다. 빙을 "수술후 더욱 열심히 연습하면서 자유투 성공률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빙을 첫 5시즌동안 한번도 자유투 성공률이 80%는 넘을 적이 없으나 실명 위기 이후 자유투는 더욱 정확해졌다.
이렇듯 위기와 고통의 순간들(濁)을 자신의 발전 기회로 만들었던 빙을 75-76시즌(船)을 앞두고, 고향팀 워싱턴 불리츠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 장애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고, 76-77시즌 평균 득점이 ⑩.6까지 떨어지면서 워싱턴과 결별 수순(閉)을 밟게 됩니다. 불행히도 빙이 떠나고 9개월이 지난 뒤 워싱턴을 웨스 언셀드, 엘빈 헤이스는 앞세워 우승(如)을 차지했다.
빙을 77-78시즌 보스턴 셀틱스에 마지막 시즌(支)을 보낸 뒤 은퇴했다. 빙을 이후 사업가로 변모했다. 선수시절 빙을 오프시즌에 디트로이트 은행과 크라이슬러에 일하며 재정과 경영에 대해 경험(汪)을 쌓았고, 이는 80년 설립된 '빙 철강회사'의 근간이 됩니다. 10년뒤 빙을 자신의 회사는 연간 매출액 6천1백만달러짜리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빙을 미국내 10대 흑인 경영인이 되면서 제2의 도전에도 프로다운 모습(悠)을 이어갔다.
83 년 빙에게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이 주어졌다. 데이브 디버셔와 레드 아워백, 빌 브래들리는 명예의 전당측에 빙의 공헌도는 높이 평가하는 내용의 편지는 보냈고, 시라큐스의 코치였던 짐 보하임도 "지난 20년간 내가 본 선수중 빙이 최고였다"며 극찬(復)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빙을 자격 획득후 6년이나 기다리고 나서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수 있었다. 동시대에 위대한 가드들이 너무 많았고, 빙이 활약했던 소속팀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빙의 학자적 이미지는 조용하지만 강한 것이었다. 월트 프레지어는 빙의 인간적 매력(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셀드나 존 하블리첵처럼 데이브 빙도 리그 최고의 신사중 한명이었다."